문혜자, 그림은 리듬을 타고
추상회화란 내적인 실재 및 움직임을 육화하는 활동에 견줄 수 있다. 내면 상황을 필선의 세기나 방향을 통해서 혹은 색깔의 조화나 대비를 통해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적 움직임은 마음과 정서같은 것들로 요약되며 그것들이 육화하는 과정에서 리듬과 색채를 매개로 하게 된다. 물론 이점은 실제 이미지를 다루는 형상미술도 마찬가지지만 추상의 경우 실재 이미지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리듬과 색채에 대한 의존도가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다. 리듬을 얼마나 잘 구사하고 색채를 얼마나 잘 요리하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 된다. 이러한 리듬과 색채는 문혜자의 작품에 있어서도 중핵적인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혜자의 회화는 격정의 소용돌이를 방불케 했다. 거센 붓놀림과 즉흥적인 필치가 화면을 주름잡는가 하면 원색조의 칼라가 충돌하면서 너울거렸다. 거친 파도가 몰려오고 천둥과 함께 비바람이 캔버스를 휩쓸고 지나간듯 질주하는 감정이 화면에 자리했다. 보색의 충돌, 포효하는 듯한 제스처, 화면 곳곳에 자리잡은 동요와 긴장의 편린 등. 이와 같은 다이나믹한 표정은 재즈음악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재즈의 빠른 속도감, 즉흥성, 효과음, 여러 악기를 연상시키는 각기 다른 음색, 박진감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이렇듯 화면을 여러 무늬를 지닌 감정의 음색으로 직조해간다. 그림을 보지만 실제로는 음악을 듣는 것처럼 청각적이다. 여러 감정의 색채,자유로운 동작, 조화로운 구성이 화면위에 리드미컬하게 흐르고 이러한 음악적 감성이 문혜자의 붓터치를 이끌어간다.
추상적 요소를 잠시 뒤로 하고 몇 년전부터 작가는 ‘스토리텔링’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해맑은 색상은 여전하지만 구성적인 부분이 눈에 띄고 장식이나 패턴들도 현저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러 이미지들이 뒤섞여 화면은 왁자지껄한 공간으로 변한다. 아무래도 이미지가 있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여러 이미지들을 즐겨듣는 음악이나 만화,동화에서 빌려오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은 상호 인과성을 띠기보다는 독립된 이미지로 존재한다. 가령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에 달리는 자전거를 탄 두 남녀,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에서 춤추는 연인, 무지개가 뜬 백화난만한 동산에서 춤추는 무희, 노래하는 여인, 한 꾸러미의 풍선을 잡고 어디론가 달리는 사람, 그런가 하면 으스스한 핏방울과 무덤같은 이미지도 등장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어떤 뚜렷한 줄거리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전혀 상관없는 것도 아니다. 꽃들은 배경으로 보조역할을 맡고 창공이나 밤하늘에 사람이 떠다니는 식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런 이미지들을 넣은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토막난 이미지속에 감추어진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음악을 듣고 애니메이션을 보고 동화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추슬러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가 경험한 것들의 감회를 구상 또는 추상의 형태로 남겨놓은 것이다. 산과 들을 보고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나 음악연주나 문학책을 읽고 자신의 감흥을 남기는 것과 기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작가가 “현대음악이 내게 부여하는 가장 앞서가는 느낌을 차용하여 나의 그림에 표현하고 있다”는 말은 이런 작업방식을 보여준다.
음악의 변주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선율의 부분일 것이다. 음악적 선율을 꺼집어내기 위해 여러 기법과 표현법을 동원하지만 작가는 특별히 붓놀림에 유의한다. 형태를 묘사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붓의 놀림 그 자체에 중점을 둔다. 그 때문에 화면은 끝없이 동요하고 출렁인다. 필선이 화면을 자유로이 주름잡고 있는가 하면 그 결과 화면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무대 혹은 어느 가을의 호젓한 길가처럼 나뭇잎이 흩날리는 장소로 변한다.
그런데 그의 작업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가 사용하는 붓은 0호로 여성용 매니큐어 붓보다 가늘다. 이 붓으로 모든 작품을 완성하는데 대작을 그리든 소품을 그리든 이 붓만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나면 누구든 탄성이 절로 나올 것이다. 한점을 완성하는데 수십자루의 붓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이 붓을 고수하는 것은 세필이 가져다주는 선적인 특성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붓이 그어질 때마다 느껴지는 감촉도 그렇지만 단 한번으로 완성되는 선적인 흐름, 즉 곡선은 자유로운 리듬과 경쾌한 속도감을 낳고 작가는 이 맛을 살리기 위해 세필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해낼 수 없는 독특한 수법으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작품이다.
가느다란 붓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체의 움직임을 실어내는데 용이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붓이되 무엇을 표출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성을 갖으며, 자기의 호흡과 숨결, 맥박을 실어낸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호흡과 맥박이 실린 필선들은 화면에 미묘한 리듬을 만들면서 작가와의 거리를 좁혀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작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음악적 감성은 필선의 효과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여러 이미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무희의 춤사위, 아래로 추락하는 사람, 달리는 자전거,움직이는 패턴들, 뒹구는 낙엽, 떠도는 음표들과 부유하는 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적인 이미지들을 기본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셈인데 마치 음악에 맞추어 이미지들이 들썩이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음악 애호가로서의 ‘음악에 대한 조형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인데 색상마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주변의 색상과 조응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내며 감상자를 격정에 빠지게 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로 되돌려놓는다. 그에게 색은 감정을 퍼나르는 매개물이고 전체 화면은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는 콘서트장으로 탈바꿈된다.
“음악은 삶에 에너지를 부여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음악회에서는 연주자들의 긴장과 여유 그리고 열정의 희비가 관람객 또는 감상자에게 숨을 죽이고 음악에 빠져 들게 한다. 그런 음악이 주는 에너지를 화폭에 구현하기 위해 나는 춤사위를 통해 긴장과 열정, 그리고 거침없는 속도나 주저함 등을 솔직하게 옮기도록 노력한다.”(작가노트중에서)
음악은 그의 작품 전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그림제작에 있어서 그는 한번 붓을 그으면 고치거나 지우지 않고 처음에 그려진 형태 그대로를 유지한다. 작가는 일관되게 이런 절차를 계속해가고 있다. 이유인즉 붓놀림의 흔적이 수정되고 고쳐 그려진다면 맨 처음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끊어지거나 느려져 음악적 표현에는 적합하지 않고 에너지가 결여되기 때문이란다.
이런 방식은 공연예술, 특히 음악연주와 유사하다. 음악연주에선 한번 실수하면 고치거나 수정할 수 없다. 실수마저도 작품의 일부에 포함되며 예상치 못한 순간이 발생하면 그에 즉흥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문혜자가 그림을 그릴때 필선의 일회성을 강조하고 밑바탕의 올을 그대로 남기는 틈새기법은 캔버스위의 행위를 음악공연처럼 일종의 퍼포먼스로 여기는 그의 독특한 회화적 발상을 엿보게 한다. 드로잉하는 첫 과정에서 마무리단계까지의 모든 과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빗나가거나 서툴게 그어진 부분까지 가감없이 보여준다. 음악이 우리 삶에 활기와 에너지를 불어넣듯이 작가는 회화도 우리 삶에 활기와 에너지를 불어넣는 통로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문혜자는 오늘도 ‘음악의 회화적 변주’를 계속해가고 있다. 그림의 형식이 음악의 느낌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를 심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몬드리안과 칸딘스키가 그랬고 클레와 들로네가 그랬듯이 회화는 음악을 구상화하는 데에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혜자가 선을 리듬으로, 색을 음표로, 구도를 음악적 구성의 부분으로 막힘없이 대체시키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인접장르와의 융합을 통해 회화의 지평을 넓히고 예술적 심도를 더 깊이있게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의 그림에서 슬픔과 기쁨도 모두 삶의 테두리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비탄과 희열을 어떻게 표현하든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감정들이며, 진실한 정서인자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지나가버리면 잊혀질 것같은 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려 하지 않았나 짐작케 한다. 어쩌면 그림이란 여러 색깔의 감정을 승화시켜 지고한 것으로 바꾸는 변환 장치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피어오르는 감정들
작가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을 명증한 색과 리드미컬한 필선으로 직조하며 한층 표현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청신한 기운을 내장한 듯한 조형언어를 통하여 생명의 순수함을 증폭시키는 것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부수물이다. 그의 회화는 기본적으로 밝고 청순하다. 어둔 이미지가 부분적으로 있기는 하나 삶을 긍정하는 부분이 훨씬 더 크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이미지든 색깔이든 구도이든 ‘호흡한다’는 걸 느낀다. 무엇하나 정지된 것이 없다. 대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으로 보고 생기가 띠며 명증한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그의 예술을 추동하는 힘이 충천한 생명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작렬하는 생명의 불꽃속에서 우리는 생의 환희와 기쁨에 전율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로망에 취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인간군상을 마치 오선지 위를 분주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음표처럼 거기에 고저강약을 보태어 실어낸다. 마치 우리의 일상적 실존은 친숙한 감정들로 이루어졌고, 건강한 감정은 행복한 삶의 필수란 점을 환기시키려는 듯하다.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사물에 관심도 없고 행동에 끌림도 없을 것이다. 봄철이면 코끝을 파고드는 꽃향기에 취해버리듯이 그의 작품을 통해 영혼의 향기가 번져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