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6. 17 ~ 6. 29 혜화아트센터 (T. 02-747-6943, 대학로)
염화 미소 : 불법이 잠시 머무르다
문혜자 초대전
글 조소영(평론가)
문혜자 작가의 쉼없이 이어진 예술적 작업과 열정, 그리고 명상은 어느덧 불교의 철학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올해 들어 보여준 작품의 제목은 <붓다의 미소>로 염화미소라는 유명한 부처의 가르침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말이 없이 전한 설법처럼 붓다의 손에 있던 한 송이의 연꽃이 부처의 법이고 그법을 깨달은 제자의 미소는 부처가
전한 다르마와 같은 것이다. 그 동안 끊임없이 작품에서 내려놓으려고 했던 작가의 노력은 결국 말이 없이 전해진
붓다의 설법과 그 맥이 상통한다.
우선, 2021년 5월의 작품들 잠시 언급하면, 격자 문양은 규칙적인 호흡과 일상의 평안이 유지되는 안정적 구성을
보여준다. 연꽃이 격자무늬 창살 위로 피어 올라있다. 화려한 연꽃이 수줍은 듯 배경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두텁게
칠 되어진 어두운 사각형이 배경의 규칙적 패턴에 딱 들어맞아 연꽃의 주변 격자무늬 사이에 자리 잡은 것이 보인다.
여기서 작가의 작품에 등장 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 데, 캔버스천 위에 연필선으로 그린 창살 문양, 색깔을 채워
넣은 창살 문양들, 적갈색의 사각형, 그리고 연꽃이다. 이 요소들은 2022년 1월 작품에도 등장한다.
2022년 1월의 작품을 보면, 2021년 작품과는 달리 연꽃이 창살 문양과 적갈색 사각형 위를 덮고 있지 않다.
연꽃은 배경이 되는 창살 문양에 스며 있는 듯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맑고 처연 함이 오히려 배경의 무게를 이기고
떠오른다. 화면의 중앙에서 가장 화려한 모습의 연꽃 이었을 거라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연꽃의 흔적이 보인다.
그 대상은 존재하고 있는 듯하고, 사라질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중도인가?
캔버스위로 떠오르는 연꽃은 무념 무상 무욕의 존재로 작가의 표상이 되었다. 놀랍다. 이것이 오로지 즉흥적인
붓질로 가능한 결과물 이라니! 작품이 참으로 아름답다.
또한 작가는 캔버스라는 2차원의 평면을 “그린 듯-안 그린 듯”이 극복한다. 회화가 공간을 얻는 순간이다. 그녀의 회화가 겪어온 많은 변곡 점들이 있었지만 이 번엔 비우고 또 비움의 결과로 시각적 공간이 생긴 것이다. 마치 캔버스와 보는 이 사이에 연꽃이 떠있는 것 같다. 오랜 기간 작가의 공부와 사색은 그 때마다 늘 작품으로 구현 되었고 이 번에도 변함이 없다.
캔버스 에는 물감을 칠하지 않은 부분에서 여러 겹이 칠 되어진 부분까지 다양하다.
격자 무늬의 화려한 색의 규칙적 배열은 안정감 있게 배열되어 있으나 그렇다고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 답답함은
결코 문혜자 작가의 것이 아니다.
정사각형의 캔버스의 세 귀퉁이는 전혀 물감을 칠하지 않고 캔버스가 숨쉴 공간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 창살이 방과 방을 나누기도하고 연결하기도 하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하듯, 배경이
되는 문양이 창문과 벽의 상징을 동시에 갖고 있다. 캔버스 위에 작가는 계속 중의적 상징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손대지 않은 캔버스의 세 귀퉁이는 전시된 공간의 벽과 일체가 되어 격자 무늬를 창살처럼 보이게 하고, 짙은 적갈색 직사각형을 패턴사이에 불쑥 끼워 넣는다. 규칙적 패턴에 불쑥 끼어든 직사각형은 심신의 안정을 방해하고 평온한 수행자가 피하기 힘든,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벽처럼 단단하고 뚫기 힘든 장애로 보인다. 작가는 그의 노트에서 “이치의 망상으로 채워진 구성 위 허공에 연꽃이 여여 하여 중도를 이룬다”고 했다. 작가에게 일상적 삶은 “이치의 망상”이다. 화려한 색이 규칙적으로 펼쳐지지만 갑자기 꽉 막힌 벽이 일상에 불쑥 끼어들기도 한다. 작가의 이 두 회화적 요소 위에 한 송이 아름다운 연꽃이 즉, 작가의 참마음이 연꽃이 되어 수면위로 떠오른다. 나는 문혜자 작가의 작품에서 그 꽃이 빛이 되는 걸 본다.
당나라시대의 지성 배휴거사와 스승 황벽선사가 마음에 대해 묻고 답한 <전심법요>를 해석한 책<허공을 나는 새 흔적이 없듯이>라는 책을 정독하고 있다는 문혜자 작가는 그 불법의 대화를 읽으며, 부처의 미소가 머물 자리를 마음 한 켠에 내어주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흔적도 없는 마음의 경계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웃는 고양이”체셔”처럼 아니면,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머물기도 하고 동시에 사라지기도 하는 데 그것은 마치 수행자가 매우 원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 때나 나타나고 사라진다.
참마음은 원래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데 수행자들의 집착이, 혹은 망상이 겹겹이 눈을 가려 볼 수 없다가 문득 보였다가 하는 그런 것이다. 작가의 연꽃은 이제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붓이 가는 대로 마음을 비우자 작가의 참 마음이 한 연꽃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가 그의 참마음을 세세히 그리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거늘... 규칙적인 일상과 수행의 장애위에 무심하게 올려놓은 부처의 미소에 다름아니다. 한참을 지켜보고 있자니 작가가 그 연꽃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아름다움이 흩어지는 것을 그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문혜자 작가는 상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