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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7일

영감으로서의 음악과 회화적 변주[오광수(미술평론가)/ 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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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으로서의 음악과 회화적 변주 문혜자의 근작 회화에 대해

회화와 음악의 관계는 19세기 후반 이후 여러 뛰어난 미술가들에 의해 천착된 바 있다. 미술가 가운데 음악에 심취한 경우는 적지 않다. 음악을 통해 깊은 창조적 영감을 받은 예 역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화가 드라크로아는 그의 일기 가운데 동시대 자기 주변의 미술가들보다 음악가를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드라크로아의 분방한 색채의 드라마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를 유추해보기에 어렵지 않다. 20세기에 들어와 뒤피, 칸딘스키, 클레, 들로네는 음악의 세계와 회화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어느 행복한 접점을 향해 달려간 인상이다. 이들은 미술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다. 뒤피는 경쾌한 리듬의 필치와 밝고 화사한 색조로 음악을 소재화한 작품을 여러 점 남기고 있다. 음악을 색채로 번안한 점에선 음악의 회화화 현상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모차르트는 분홍의 빛깔로, 드비쉬는 연두의 투명한 빛깔로 구현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예는 몬드리안일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을 피해  미국 뉴욕으로 소개해있는 동안 재즈에 매혹되어 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의 생애의 대단원을 장식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와 <빅토리 부기우기>는 그가 뉴욕에 건너와 재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이 두작품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안타깝게도 연합국의 승리를 보지 못한 채 44년 작고 하였다)

우리 주변의 미술가들 가운데서도 음악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거나 심취한 미술가를 종종 만난다. 그러나 음악이 자신의 회화 세계에 어떤 직접적 영감원이 되었다는 예는 좀처럼 만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문혜자는 다소 예외적인 경우임이 분명하다. 여러 평자들이 그의 회화를 언급하면서 "고전 음악과  재즈 음악이 그에게 염감을 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단상과 수필 속에선 미술가들보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압도하고 있다. "그들의 훌륭한 음악을 어떻게 조각으로 형상화시킬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여러 곳에 편재된다. 그가 언급 하는 음악가는 베토벤, 바그너, 쇼팽, 바하, 차이코프스키, 구스타프 말러, 레나드 번스타인, 스트라빈 스키, 쇤베르그, 그리고 재즈음악등 고전에서 현대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영역에 미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은 휴식, 또는 정신의 고양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된다. 문혜자의 경우에서도 이런 점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인 예와는 다른 점은 보다 직접적이요 보다 근원적이란 점에서라 할 수 있다. 음악은 그에게 있어 삶의 기쁨을 자아내게하는 샘물과 같은 역할과 더불어 창작의 가장 직접적인 감동의 표상으로서 기능한다는 데 그 독특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음악에서 깊은 영감원을 받아들였는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되는 색채와 형태의 상호작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리드미컬한 선의 얽힘과 폭발하는 듯한 터치, 그리고 투명한 색층은 일반적인 회화의 맥락에서라기보다 음악의 직접적 번안의 결정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꽃이 피어오르듯 색채의 응어리가 상승하면서 암시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음악이 어떤 구체적인 영상을 지니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어떤 윤곽이나 암시적인 형태가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새 환상적인 색채의 여울 속으로 침잠하게 되는 것도 이에 기인된다. 싱글톤이 지적했듯이 "형태와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를 누비는 감정의 여행" 이야말로 그의 회화가 지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감은 더없이 투명하고 더없이 싱그럽다. 마치 5월의 새 식물들이 피어나듯 아직 때묻지 않은 자연의 순수함이 묻어난다. 피어오르는 색조와 겹치는 물감의 충돌이 직조되는 과정은 바로 음악에서의 소리가 서로 얽히고 엮어지면서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과 흡사하다. 청각이 시각으로 훌륭히 대치되는 역정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 R 파가노가 한 다음의 지적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녀는 즉흥적 재즈 음악의 자발성뿐 아니라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그의 전위적인 교향곡과 비슷한 에너지와 복잡성을 전달해줄 수 있는 시각적 언어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자신의 색채 조각에서뿐 아니라 유화 작품에서도 어두운 색과 불꽃같은 색이 조합되어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훌륭하게 성공한다"

문혜자의 근작은 특히 재즈 음악의 감동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많은 경우 재즈 음악은 즉흥성에 의지된다. 어떤 틀 속에 갇혀있지 않고 순간순간 솟아나는 감정의 자유스러운 직조야말로 재즈 음악의 매력이다. 그가 재즈 음악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재즈 음악의 형식이 아니라 실로 그 창작의 순수한 자발성에 기인되었을 것이다.드로잉적인 선획의 자유로운 유동이나 맑고 투명한 색채의 어우러짐은 저 바닥 깊숙이에서 피어오른 영혼의 소리에 함몰되는 감동과 다름없는 것이 된다. 피어오르는 소리들은 싱싱한 생명의 기운을 내장한 한 송이 꽃처럼, 또는 한 줄기 식물의 잎처럼 그들의 생명의 순수함을 폭발시킨다. 그렇게 선들은 전율하고 색채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어쩌면 그의 회화는 가장 지순한 순간을 향해 달려간는 순례자의 환희의 노래인지 모른다.

오광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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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min
    7월 17일

    “마티스의 색감과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이 화두였다는 이번 연작은 문혜자의 화가로 출발한 시점부터 작가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긴 사색을 여미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문혜자 작가에게 마티스와 몬드리안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우선, 마티스는 음악이 소리의 고유한 특징을 살리는 데 힘쓰는 것처럼, 미술은 색채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자신이 색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색감을 살리려고 노력했으며, 디테일을 과감히 생략하는 구성으로 주제에 몰두하려 노력했다. 위의 마티스에 대한 설명은 문혜자 작가의 색채의 사용과 주제를 위해 디테일을 생략하는 과감한 구성까지 닮은 점이 많다. 특히, 이 번 <Composition of two light sources> 2019의 경우에는 점, 선, 면, 색채라는 최소한의 회화적 요소만으로 작가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광원은 면의 구성과 색의 대비를 통해 그 존재를 인지할 뿐이다. 화면 위에 자유롭게 뻗어 있는 광선들의 방향이 두 개의 다른 출발 점이 있음을 추측케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두 개의 광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광선들은 힘차게 뻗어간다. 어디로든… 그렇다면 두 번 째,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은 문혜자작가의 작품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몬드리안은 데 스틸운동의 창시를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충분히 분석하고 단순화시키면 그 본질에 도달한다.”고 피력하였다. 사실, 문혜자 작가는 2015년 작가노트에서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 데, 그녀가 몬드리안의 작품을 보고 놀란 것은 화면을 가르는 직선들과 점, 색채가 화려하게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듯 보였기 때문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관람객들이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도 그러한 자유로운 충만을 느끼기를 바란다고 (2015년 작가노트) 했다. 마티스와 몬드리안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두 개의 광원이고, 그녀가 추구하는 예술의 모티브이다. 오랫동안 분석하고 관찰하고 구현해낸 장식적이며 동적인 충만한 에너지를 오로지 점과 선과 면, 그리고 색채로 표현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 어떻게 그려야 가장 자유로워지는지” (2000. 4월 작가노트) 항상 고민해온 결과물이 이 번 <Composition of two light sources> 2019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소영 2019.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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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일

    화가 문혜자의 비움의 철학에 의미를 두면서 계속 되었던 2018년의 compositon 작품들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화면의 분할을 실험하고 광원을 화면밖으로 옮기며, 빛에 관한 천착을 계속했던 작가가 최근 2018년 12월에는, 캔버스의 테두리로 뻗어 나가는 빛살들의 중심, 즉 광원이 그려져 있던 곳에 광원을 그리지 않고 대신 주변부에 점선형태로 원들을 그려 넣었다. 이 주변부의 중첩된 원들은 빛의 파동을 연상시킨다. 중심은 바탕색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동의 원들을 여러 겹 그리거나, 중심이 오히려 약간 더 어두워지고 주변부의 점선형태의 원이 진하고 선명하게 퍼져 나가는 밝은 파동들이나 혹은 나이테로 보이는 점선들을 그린, 이렇게 두 가지 타입의 작품이 최근 작가의 작업이다. 기존의 작품에서 보였던 강렬한 광원은 역동적 힘의 원천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새로운 시도는 정 반대의 개념으로 보이는데, 중심부의 색감이 차분하고 어두워 짐에 따라 기존의 작품에서 보였던 시선의 확장과 퍼짐이 후자에서는 중심으로 모이는 시각적 효과를 준다. 역동적 힘의 방향이 밖이 아니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전의 작품들이 빛의 발광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빛의 수용체, 다시 말해, 빛을 감지하는 기관인 눈의 홍채처럼 시선도 빛도 중심으로 수렴하게 된다. 매우 흥미로운 작품의 변화이다. 이전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역동적이고 즉흥적으로 자신의 창의적 에너지를 발산하려 했다면, 이제는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도 다분히 관조적이고 사색적으로 바뀌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작품의 변화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작가의 작업과 늘 함께하는 음악이 최근에는 문혜자 작가의 딸인 음악가 이영임이 제작한 <법흥: 한 바퀴 인생>이라는 앨범*(법흥스님 작사/ 이영임 작곡)이다. 여기엔 법흥 스님의 시에 이영임 선생이 곡을 붙인 작품들과 아름다운 명상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음악과 함께하는 문혜자 작가의 작업이 이제는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 작가의 쉼 없는 행보에 감탄을 멈추기 힘들다. 2018-12-29 조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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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5월 14일

    <Composition –비움의 철학>(2018)에 관한 짧은 생각들 <Music for charms of the night sky 005> (2016), <The Sun series> (2017), <Composition series> 소품 (2017)에 이어서 대작 <Composition- 부제: 비움의 철학>(2018)을 통해 문혜자 작가가 보여주는 빛에 관한 철학 – 평론가 조소영, 2018 지난 3년간 작가 문혜자의 작품은 하나의 주제인 빛으로 같은 듯 다른 듯, 캔버스 위에 다양한 시점과 색채를 펼쳐 왔다. 해마다 빛에 관한 작가의 천착을 따라잡는 것 또한 나에겐 늘 새로운 도전이었다. 작가의 가장 최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Composition –부제: 비움의 철학>(2018)은 작가가 지난 몇 년간 화두로 삼았던 빛, 몇 년 전 작업실에서 집으로 향하던 작가의 눈과 조우했던 가로등 불빛, 그 빛이 작가에게 불러일으켜 주었던 설렘과 기쁨의 순간을 캔버스 화면에 담으려고 했던 (위에 열거한) 전작(前作)들의 묶음이자 정수이다. 문혜자 작가의 회화적 구성력은 매우 논리적이어서 작품을 구성하는 회화적 요소들을 자유자재로 더하거나 빼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작가의 최근 작인 Composition (대작)의 부제는 “비움의 철학”이다. 전작들에서 작가가 한 일은 작품 안에 그간의 작가가 천착해 왔던 빛의 구상들을 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번 작품에서 작가는 빛에 관한 요소들을 아름답게 채우고 정작 광원에 관한 한, 어떤 묘사도 담지 않았다. 즉, 그리지 않아도 당당히 존재하는 광원의 실존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2016년의 작품 <Music for Charms of the Night Sky 005>에서 시작된 순수한 빛의 경험에서 시작된 빛을 향한 이끌림과 집중, 2017년 연작<The Sun>과 <The Light>에서 보여준 빛의 성질 가운데 1)광선은 직진한다. 2) 빛은 입자이다. 이 두 가지 빛의 성질이 만들어 내는 공간적 효과, 그리고 2017년 후반부에는 composition series 소품을 통해 직진하는 광선이 색의 입자로 이루어져있으며, 그런 개별 선들이 곡면을 이루며, 화면의 분할을 통해 빛이 얼마나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 지 보여준다. 지난 몇 년간, 세 가지 작품들의 구성적 요소들이 <Composition- 부제: 비움의 철학>(2018)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의 마음을 순간에 사로잡았던 광원이 이 번 작품의 중심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으며, 뻗어 나오거나 수렴하는 듯한 광선의 공간적 효과는 2017년 <The Light>의 것과 닮았으며, 소품 <Composition>(2017) 의 직선 면 분할이 이 번 대작에서는 곡선 분할로 변용되었다. 이렇듯 지난 3년 간의 작가의 빛에 관한 천착이 이 번 작품에 집대성 되었으면서도, 그 간 작가의 작품에 오랜 시간 등장해 왔던 이야기나 설명을 모두 내려놓았다. 화려한 색들의 조형적 이야기들은 몸을 감춘다. 작가는 ‘빛은 거기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비워두었다’. 작가의 연륜과 성찰이 드러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