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으로서의 음악과 회화적 변주
문혜자의 근작 회화에 대해
회화와 음악의 관계는 19세기 후반 이후 여러 뛰어난 미술가들에 의해 천착된 바 있다.
미술가 가운데 음악에 심취한 경우는 적지 않다. 음악을 통해 깊은 창조적 영감을 받은 예 역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화가 드라크로아는 그의 일기 가운데 동시대 자기 주변의 미술가들보다 음악가를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드라크로아의 분방한 색채의 드라마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를 유추해보기에 어렵지 않다. 20세기에 들어와 뒤피, 칸딘스키, 클레, 들로네는 음악의 세계와 회화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어느 행복한 접점을 향해 달려간 인상이다. 이들은 미술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다. 뒤피는 경쾌한 리듬의 필치와 밝고 화사한 색조로 음악을 소재화한 작품을 여러 점 남기고 있다. 음악을 색채로 번안한 점에선 음악의 회화화 현상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모차르트는 분홍의 빛깔로, 드비쉬는 연두의 투명한 빛깔로 구현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예는 몬드리안일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을 피해 미국 뉴욕으로 소개해있는 동안 재즈에 매혹되어 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의 생애의 대단원을 장식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와 <빅토리 부기우기>는 그가 뉴욕에 건너와 재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의 최후의 걸작인 이 두작품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안타깝게도 연합국의 승리를 보지 못한 채 44년 작고 하였다)
우리 주변의 미술가들 가운데서도 음악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거나 심취한 미술가를 종종 만난다. 그러나 음악이 자신의 회화 세계에 어떤 직접적 영감원이 되었다는 예는 좀처럼 만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문혜자는 다소 예외적인 경우임이 분명하다. 여러 평자들이 그의 회화를 언급하면서 "고전 음악과 재즈 음악이 그에게 염감을 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단상과 수필 속에선 미술가들보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압도하고 있다. "그들의 훌륭한 음악을 어떻게 조각으로 형상화시킬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여러 곳에 편재된다. 그가 언급 하는 음악가는 베토벤, 바그너, 쇼팽, 바하, 차이코프스키, 구스타프 말러, 레나드 번스타인, 스트라빈 스키, 쇤베르그, 그리고 재즈음악등 고전에서 현대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영역에 미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은 휴식, 또는 정신의 고양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된다. 문혜자의 경우에서도 이런 점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인 예와는 다른 점은 보다 직접적이요 보다 근원적이란 점에서라 할 수 있다. 음악은 그에게 있어 삶의 기쁨을 자아내게하는 샘물과 같은 역할과 더불어 창작의 가장 직접적인 감동의 표상으로서 기능한다는 데 그 독특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음악에서 깊은 영감원을 받아들였는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되는 색채와 형태의 상호작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리드미컬한 선의 얽힘과 폭발하는 듯한 터치, 그리고 투명한 색층은 일반적인 회화의 맥락에서라기보다 음악의 직접적 번안의 결정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꽃이 피어오르듯 색채의 응어리가 상승하면서 암시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음악이 어떤 구체적인 영상을 지니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어떤 윤곽이나 암시적인 형태가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새 환상적인 색채의 여울 속으로 침잠하게 되는 것도 이에 기인된다. 싱글톤이 지적했듯이 "형태와 윤곽선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를 누비는 감정의 여행" 이야말로 그의 회화가 지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감은 더없이 투명하고 더없이 싱그럽다. 마치 5월의 새 식물들이 피어나듯 아직 때묻지 않은 자연의 순수함이 묻어난다. 피어오르는 색조와 겹치는 물감의 충돌이 직조되는 과정은 바로 음악에서의 소리가 서로 얽히고 엮어지면서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과 흡사하다. 청각이 시각으로 훌륭히 대치되는 역정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 R 파가노가 한 다음의 지적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녀는 즉흥적 재즈 음악의 자발성뿐 아니라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그의 전위적인 교향곡과 비슷한 에너지와 복잡성을 전달해줄 수 있는 시각적 언어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자신의 색채 조각에서뿐 아니라 유화 작품에서도 어두운 색과 불꽃같은 색이 조합되어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훌륭하게 성공한다"
문혜자의 근작은 특히 재즈 음악의 감동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많은 경우 재즈 음악은 즉흥성에 의지된다. 어떤 틀 속에 갇혀있지 않고 순간순간 솟아나는 감정의 자유스러운 직조야말로 재즈 음악의 매력이다. 그가 재즈 음악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재즈 음악의 형식이 아니라 실로 그 창작의 순수한 자발성에 기인되었을 것이다.드로잉적인 선획의 자유로운 유동이나 맑고 투명한 색채의 어우러짐은 저 바닥 깊숙이에서 피어오른 영혼의 소리에 함몰되는 감동과 다름없는 것이 된다. 피어오르는 소리들은 싱싱한 생명의 기운을 내장한 한 송이 꽃처럼, 또는 한 줄기 식물의 잎처럼 그들의 생명의 순수함을 폭발시킨다. 그렇게 선들은 전율하고 색채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어쩌면 그의 회화는 가장 지순한 순간을 향해 달려간는 순례자의 환희의 노래인지 모른다.
오광수(미술평론가)